내가 거주중인 아파트는 수 년 전부터 재건축을 하니 마니 말이 많다가, 몇 달 전에 지구단위계획이 나왔다. 재건축에 무지했던 나는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하는 엄마에게 재건축한다는데 낭비라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내 착각. 재건축을 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린단다. 덕분에(?) 무척 더웠던 6월부터 8월까지, 주말을 제외하고 아침 8시부터 오후5시까지 크고 작은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동의서명 받아간 가구만 5가구이며, 최근엔 우리 바로 옆 집이 공사에 들어갔다.
이번 여름, 나는 자취를 청산하고 본가에 들어와 방콕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가.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고, 조용히 식사하기위해 11시 55분 정각에 먹기 시작했고, 햇빛이 가장 절정일 때 나가있어야했다.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차에 얼마간 집을 떠나 있다가 일 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경비아저씨가 옆에 오시더니 "아가씨 바로 옆 집 000호 공사 다음주부터 시작해요. 오늘 사인받으러 왔었어요". 아저씨에겐 젠틀하게 알겠다고 말해놓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 옆 집 공사한다는데 무슨 말이야? 알고 있었어? 왜 말 안했어?" 라며 인사는 커녕 짜증을 내버렸다. 엄마는 속상한 얼굴로 "응..... 제일 먼저 너가 걱정되더라. 말 하려고 했어. 미안하다." 그 순간 아차싶었다. 나만 힘든거 아니지. 엄마도 옆 집에 이사오는 사람도 아무 잘못이 없다. 누구를 탓할 순 없다. 굳이 탓하자면 오래된 아파트를 탓하겠다. 아니지 내 빌어먹을 예민함을 탓해야지.
가족이 다 같이 외출했던 어느 날, 경비아저씨께서 옆 집이 왔다 갔다며 큰 보자기를 주시는게 아니겠는가. 집에 와서 보니 주먹만한 키위가 한 가득 있었다. 엄마는 이렇게 큰 키위는 처음본다며, 너무 잘 익었다고. 근데 이거 받아도 되냐고 아빠랑 얘기를 하는게 아니겠는가. 순간 예민해져 정신적 손해 운운하며 키위는 내 스트레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를 냈다. 전혀 화낼 상황이 아니었는데.
"딸아 그러면 안 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 반갑기도 하고 어린 시절 생각도 나면서 웃음이 났다. 아빠는 호탕하게 이거 안 받으면 옆 집이랑 싸우자는 거 아니냐고, 답례를 고민하는 엄마에게는 그건 안 받는 거랑 매한가지라고 나중에 만나면 잘 먹었다고 인사하면 되는거라며 그 자리에서 씻어서 반으로 갈라 숟가락으로 퍼먹는게 아닌가. 덕분에 우리 가족에게 한 동안 키위가 대화의 주제였다. 너무 맛있는데 어디서 산 걸까하고. 엄마는 너가 제일 맛있게 먹었으니 옆 집 미워하면 안 된단다ㅎㅎ
우리 윗 집은 아가가 둘이 있는데 신생아 때는 밤에 잠도 안 자고 울고, 이제는 제법 커서 뛰어다니면서 논다. 난 윗 집 가족을 본 적이 없지만 엄마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만났다며, 애기엄마가 고생이 많다고 걱정을 하곤 한다. 나는 그 아가들의 소리를 가끔 듣지만, 부모님은 몇 년간 들었으리라. 그래서 물었다. 엄마 진짜 괜찮냐고. 그러니깐 너희들 키울 때 생각도 나면서 괜찮단다. 게다가 아기 엄마가 소리 한 번 안지르고 아이들을 키운다며 대단하다는거 아니겠는가. 처음엔 헛웃음이 났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주친 적도 없는 윗집 아가들의 소리가 귀엽게 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가들이 공사때문에 힘들지 않을까하고 걱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ㅎㅎ
소음은 내 능력 밖의 영역이다. 그래서 더 답답한지도 모르겠다. 9월까지 계속 될 소음친구야, 잘 지내보자! 잘 부탁해!
슬기로운 인간생활/일기
소음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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