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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인간생활/연애

너에게만 아름다운 이별

by 살자!! 202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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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 연애에 클리셰처럼 나오는 말.
상대는 어떻게 느꼈을지 몰라도 나에게 이별이 아름다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의연한 척 이별을 받아들였을 뿐, 매번 만남의 끝에 서 있는 내 자신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렇다고 모든 이별이 쿨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헤어지자 하고 붙잡아도 보고, 바람피운 그놈에게 바람피우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도 못 했고, 그 X의 전화를 받기 위해 뮤지컬을 놓친 적도 있고. 이렇듯 난 전혀 쿨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림자라도 밟고 싶지 않은 그 X는 나와의 만남과 이별을 너무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다. 너한테만 아름다운 이별이었다고. 너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네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헤어졌으니 좋았나 본데.. 난 너 그림자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실제로 마주쳐서 너무 불쾌하다고.


그와 만나는 1년 동안, '대화'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언어폭력에 시달리느라 몸이 많이 상했다. 그가 매번 하던 말.

"넌 왜 이렇게 자주 아파? 뭘 했다고?"

처음엔 악에 받쳐 따지다가도 끝에는 울기만 했다. 그러면 그는 울지만 말고 대화를 하자고 했다. 아까 다 말했는데 무슨 대화를 더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와 풀고 싶은 마음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그가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대화를 해야 했고, 그럴 때면 나는 그만하자고 했다. 그와의 숨 막히는 대화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나는 매번 이별을 말했고, 매번 진심이었다. 난 그가 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관계 정리가 쉬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번 똑같은 패턴의 싸움을 했다. 그는 우리가 하는 건 대화지 싸움이 아니라고 말했다. 가스라이팅.. 그에게는 너무 과분한 말이다.


12개월가량의 서사를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와 헤어진 지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후로 난 연애를 끊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반대로 그와 만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기 마련인데, 늘 그 감정을 경계했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만난 남자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는 사람. 그러나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유일한 X.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게 너무 중요한 날에 그를 마주쳤다. 그와 마주한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탓인지 신기하리만큼 감정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내 스스로 많이 컸다고 뿌듯해하던 차, 익숙한 번호로 문자가 왔다. 읽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차단을 했어야 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어 친한 선배가 나한테 오랜만에 이렇게 문자를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 것 같냐고 묻고 다녔다. 열이 명 열 다 이 사람 누구냐고 물었다. 오지랖이 너무 과하다부터 시작해서 너를 너무 다 아는 척한다, 설령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런 말 하는 건 실례다 등등.. 그 당시에는 내 감정을 공감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아졌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와서 지금까지 나를 삼키고 있다.

언젠가부터 개인적인 연애사를 남들한테 얘기를 안 하게 됐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괜히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불필요한 편견이나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적당한 대화는 필요했다. 만약 지인들에게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지, 뭐가 잘 맞는지 등등에 대해 얘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부터 시작해서, 왜 멍청이같이 그런 말을 들으면서 1년이나 만났을까 하는 생각에 괴롭다. 하지만 후회한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내 귀를 씻는다고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감정 또한 내가 자초한 일이니 극복하는 것도 내 몫이겠지.


그가 늘 했던 말이 있다.
"네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부럽다."
"너의 친구들은 너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
"내가 부모님보다 너를 더 잘 알아. 그러니깐 내 말 들어."
"네가 복이 많다. 난 네 팔자가 제일 부러워."

바보 같은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도리어 웃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무시하는 말들이었다. 뭐.. 저 말들은 애교다. 장문의 문자로, 또 긴 시간 들었던 설교들을 필기했다면 책 한 권 나왔을거다. 다 잊어버렸지만 저 말들은 워낙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서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혹시 그때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 관계에서 나오라고. 나를 위하는 말이 아니라고. 그 사람이 없어야 내가 더 나답게 잘 살 수 있다고.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있고, 같은 목적지로 가는 길도 여러 가지라고.

인생에 정답은 없다. 누군가가 내 인생에 정답을 알려준다고 한다면 멀리해야 한다. 그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알아차리기 어렵겠지만..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자책하지 말길 바란다. 자책하면 내 감정과 시간만 아깝다. 지금부터 같은 실수 반복 안 하고 잘 살면 된다.

오답노트까지 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티스토리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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